하얀 눈이 날리는 추운 겨울 날 고슴도치가 한 마리가 벌판을 헤메이고 있다. 추위도 추위지만 마지막으로 먹은 때가 언제인지 생각나지 않는다. 힘이 빠져 어지럽기도 하지만 불안하고 두렵다. 언제 하늘 위에서 부엉이나 독수리가 달려들지도 모르니까. 해서 빨리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오랜 시간 혼자 헤매다 보니 배고프고 두렵고 또 외로웠다. 그러던 중 바위 사이의 틈새를 따라 추위를 피해 기어들어 간 길이 땅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바람이 잦아든 그 어두운 땅굴 안에서 깜짝 놀란다. 자기와 같은 고슴도치들이 서로 모여서 웅크리며 추위를 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반가운 마음에 조금씩 다가가다 한 고슴도치의 위협을 받는다. 나를 가시로 위협하는 게 아닌가? 단지 반가운 마음에 다가갔을 뿐인데 각자 자기 영역이 있는가 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 동굴 밖으로 나왔다가 마음을 다시 고쳐먹는다. 다시 마주한 동굴 밖은 사나운 눈바람이 불고 너무나 추운 것이다. 다시 방향을 바꿔 슬금슬금 무리 근처로 다가가다 자기도 모르게 한 고슴도치를 찌르게 된다. 영문 모르고 가시에 찔린 고슴도치도 깜짝 놀라 가시를 세우며 다시 공격적으로 변한다. 가까이 가면 서로 상처주기 쉽고 그렇다고 너무 떨어져 있으면 춥고 외롭다. 인간의 존재성과 관계성을 풍자한 우화. 쇼펜하우어의 고슴도치 딜레마이다.
중첩적인 존재인 인간을 여러 방면에서 다르게 보고 해석할 수 있지만 그 성질을 크게 나눠본다면 존재성과 관계성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존재와 관계는 욕망을 사이에 두고 서로 부딪친다. 상황에 따라 욕망의 힘은 변하는데 두 성질을 동시에 충족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삶의 생로병사에 따라 욕망의 세기와 성질은 다 다르다. 마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에 따라 나무는 존재의 모습을 바꿔야 하는 것과 같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존재성과 관계성의 갈등을 혼자서는 온전하게 존재하기 힘들고 그렇다고 같이 있으면 서로 상처 주기 쉬운 인간들의 모순적인 삶을 고슴도치 우화를 들어 풍자하고 있다.
인간이 문명이라는 동굴 안에서 함께 살아오면서 가시적인 폭력의 파괴력은 꾸준하게 감소하여 왔다. 이제 문명화된 우리의 일상에서 폭력은 도처에 은폐된 형태로 숨어서 존재한다. 그 중에서 비교적 쉽게 경험하는 것은 일상의 언어 폭력이다. 언어폭력에 오래 노출되면 그 고통에 차츰 둔감해진다. 그 폭력에 대응하면서 차츰 나의 말투도 변화한다.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나의 말습관은 어떠한가? 현대의 대화에서 폭력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먼저 시간의 분배가 다르다. 대화에서 누가 주로 말하며 시간을 점하는가를 보면 그 서열구조를 가늠할 수 있다. 상대를 묻지 않고 듣고 싶은 의사를 고려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무한반복 하는 것은 대화보다 말의 폭격에 가깝다. 변화가 빨라지고 시간이 점점 중요한 자원이 되면서 관계에서 고통은 주로 두 가지 상황에서 나온다. 먼저 내가 싫어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같은 시간과 공간을 써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더 고통스러운 상황은 언어 구사 능력이 나보다 못한 상대방을 상관으로 모셔야 할 때이다. 즉 나보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의 지적과 지시에 나의 행동과 진로가 좌우되는 상황. 나의 자유가 저당 잡힌 그 상황은 비극적인 고통. 그 자체이다.
여기에 더해서 대화를 언어의 격투기로 보는 사람을 만날 때 상황은 격투기장으로 변한다. 삶에 정답이 없듯이 대화는 관계를 위한 성인들의 언어게임이다. 언어를 통한 유희. 언어 놀이의 즐거움으로 공동체의 문화와 삶은 더욱 풍부하고 안전해질 수 있다. 반대로 대화에 반드시 결론이 있어야 하고 그 내려진 결론에 상대가 반드시 굴복해야 한다면 분위기는 팽팽한 풍선이 된다. 대화가 업무사항이 되면 긴장된 공기는 더 팽팽해지고 조금만 다른 의견과 지적은 레코드 판 튀듯 감정에 불협화음을 낸다. 다른 의견이 잡음이 되면 웃음은 점차 줄어들고 유머도 다른 이의 입을 막는 데 사용된다. 유머를 하는 사람은 웃지만 분위기에 냉기가 돈다. 유머 안에 뼈가 들어 있으니까. 상대의 말문을 막고 무안하게 하는 데에 쾌감을 얻는 사람은 성숙하지 않은 사람이다. 이런 분위기는 모든 사람들을 미숙한 아이로 만들기 때문이다.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보다 본인 혼자의 노력으로 이룬 성공 경험이 많을수록 목표에 다가가는 효율성에 집착하게 된다. 상호합의라는 비효율을 견디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일단 문제가 생기면 문제해결에 몰두하고 과정에는 소홀하게 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니까 과정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것이 익숙하게 되면 주고받는 언어게임을 과정이 아닌 승부를 위한 말의 격투기매치로 생각하게 한다. 이런 상황은 다른 의견에 대한 납득이나 동의는 곧 패배감을 뜻한다. 결국 문제는 해결된다 해도 대화 참여자들은 감정의 상처를 입게 되고 앙금이 생기며 비슷한 그런 말의 교환은 되풀이될 것이다.
대화는 승부를 보는 격투기장이 아니라 서로의 즐거움을 위한 무도장에 가깝다. 리듬과 흐르는 음률에 나의 몸을 맡기고 불확실함에 내 엉성한 실수를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나의 실수를 회피하지 않는 다는 점은 감정적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말과 같다. 상대의 부족해 보이는 말을 견디며 들어주고 상대의 실수에 눈감는 여유는 나의 감정적인 용기에서 나온다. 서로의 실수를 눈감아 주며 쌓이는 신뢰는 함께 모여서 쌓이고 분위기로 변하여 이제 어느 정도의 실수나 어려움은 받아넘겨 소화하는 신뢰분위기. 넉넉한 소화력을 가진 신뢰 공동체가 된다. 이것이 대화를 통한 수평적인 상호관계를 쌓아가는 동행 길이다. 이러한 방향이 추운 외로움에서 따듯한 관계의 동굴 안에서 함께 머물 수 있는 거리의 조절을 익히는 방법일 것이다. 가시를 지니고도 상대를 위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서로를 존중하는 언어훈련. 대화 연습이 필요한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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