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돌한 선 머슴처럼 자랐다. 그런데 제 아빠(공학박사, 오타와대 교수)를 도승 했는지 매우 영리하고 경쟁심이 강해 학교 성적은 우와 수 뿐이었다.
10학년 때부터 글쓰기를 시작한 그녀는 온타리오 내 신문 잡지 등에 Gloria란 필명으로 뻔질나게 글을 올리고 문학 작품 공모에 당선하는 등 어느새 유니콘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한, 두 번쯤은 대견하고 집안의 자랑거리로 여겼지만 뻔질나게 “엄마아~ 나~ 또 상 탔어!하고 사뭇 미안해 하는 본인이나,“으응~ 그래~ ?하며 예사롭게 여기는 식구들이나 서로 피장파장이 되어버렸다.
로우 스쿨 다닐 때는 더욱 두드러져 음악, 작사, 작곡에 심취했다. 언제나 그녀의 손에는 펜과 수첩이 쥐어져 있어 시 공을 가리지 않고 갑자기 떠오르는 영감을 놓칠세라 수록했다. 유별난 손녀를 둔 안사돈께서 아무리 둘러봐도 우리 집안은 글과 거리가 먼데 그러고 보니 외탁을 한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다.
여름방학 때는 등록금을 보탠다며 아르바이트 외에 통기타를 키며 자작노래를 부르는 거리의 뮤지션으로 탈박꿈했다. 로스쿨 재학 때는 입버릇처럼 “나는 로이어가 되도 단지 돈을 벌기 위해 사법대서 역할이나 하는 커며설 하급변호사나 온갖 괴변으로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모르는 악덕 변호사로 사느니보다는 약자 편에 서는 정의로운 인권변호사가 되겠다.라고 속내를 다짐하여왔다. 변호사자격을 딴 후 이미 내정된 온타리오주 법조계취업을 마다하고 원주민의 인권보호를 위해 동북부 누나부트주로 부임한지 어언 2년째이다. 외손녀의 불후의 문하적 열정과 기승은 외국을 떠돌고 북극에 가서도 인간 존엄과 인권수호의식만큼이나 강한 열의로 창작과 생소한 설국의 이야기들을 꾸준히 전해주고 있다.
막내 친 조카딸 민경옥은 다섯 살 때 아빠를 여의었다. 매우 총명하고 명랑하며 노래도 잘 불렀다. 서울대 음대생 시절 홀 엄마가 경영하던 포목점 경영실패로 살던 집이 빚잔치로 없어지고 간신히 그녀의 재산 일호인 피아노 한대만을 동냥처럼 간신히 구해냈다. 그때부터 셋방살이 소녀 가장 신세가 되었지만 그 애는 성악뿐만 아니라 무용, 오페라에도 탁월했다. 교회대학생 반에서 같은 멘토 역할을 하던 강직한 신앙의 동지 오덕호와 결혼하였다. 오덕호는 보스톤 대에 유학 후 귀국하여 광주에서 목회와 교수 생활을 했다.
온 가족을 데리고 다시 미국 유학을 떠나 유니온 신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는 동안 조카딸은 뮤지컬을 전공한 후 함께 귀국하여 오 박사는 십여 년 후 신학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했다. 박사 학위를 수령하고 돌아올 때 두 아들은 가장 힘든 중삼, 고삼 학생이었으나“너희들을 한국인이다. 조국을 위해 생을 바쳐야 한다.고 울고불고하는 두 아들을 강제 북송하다시피 끌고 돌아온 비정의 아버지 오덕호 목사!
그곳 버지니아주에 사시는 작은아버지께서“학교 적응이 어려우니 두 아들 장래를 생각해서라도 남겨두고 가라!라고 수 없이 타일렀지만“ No뿐이었다. 귀국 후 아이들이 겪은 정신적 고통과 문화적 갈등은 비참과 따돌림으로 까지 이어졌다.
지난해 조카딸로부터 한 다발의 인쇄물이 왔다. 부랴부랴 펴보니 한국 문인협회월간지에 실린 수필집이었다. 여태껏 몰랐던 이야기들이 새겨져 있어 가슴 아프게 했다. 눈물 아니고선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지나간 사연들이 담겨 있음에야……. 성악뿐만 아니라 피아노 연주, 무용과 뮤지컬, 오페라 등에서 두각을 드러낸 살가우면서 강한 의지를 도출한 멘토, 가난한 성직자의 아내임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무대에 설 전날, 엄마가 딸의 단벌 옷을 깔끔히 세탁해 주려다 뜨거운 물에 오그라트린 의상을 입고 주역을 끝냈 노라는 글을 읽으며 흐느꼈다. 평생 헌 옷 가게를 어슬렁거리면서도 능히 예술인, 음대교수, 사모, 문인으로 자유 자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야 말로 괴짜의 소치가 아닐런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