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캘리포니아 롤부터 시작해볼까.
대형 냉장실 뒤로 들어가면 크라상, 치킨, 튜나, 치즈와 각종 채소들, 전날 준비해 놓았을 햄과 스시밥 등이 정리되어 있다. 처음 몇주간은 이 냉장실 안에 들어와 재료를 챙길 때마다 이 안에 갖히는 상상을 하곤 했다. 첫날, 뒤로 문이 닫힌 것을 알고 당황한 나머지 문을 밀지 않고 당기는 바람에 몇초간 열리지 않는 순간을 겪고 난 뒤 였던 것 같다. 폐소 공포증 때문에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 조차 꺼리는 내게 이 추운 냉장실은 남사스러워 어디가서 말도 못할 작은 두려움이었다.
스시밥을 따뜻하게 데우며 비닐 장갑을 비장하게 끼고 김을 여섯장 깔고 심호흡을 한다. 일단 캘리롤 여섯개 그리고 다이나마이트로 넘어가자. 밥을 정성스럽게 펼치고 뒤집은 뒤 아보카도와 오이 게맛살을 차례로 올린 뒤 말기 시작한다. 김밥도 잘 못 만드는 내가 난생 처음 첫 캘리롤을 말던 순간 사장님이 응원하듯 귀에 대고 했던 말이 왜 매번 이렇게 생각이 날까. “처음 밥과 마지막 밥이 만나야 돼. 그렇게, 만나야 돼” 신기하게도 그 말을 주문처럼 떠올리면 정말 양쪽의 밥들이 잘 만나 제법 탄탄한 롤이 탄생한다. 예쁘게 썰어 담아 깨를 뿌릴 때, 이 감정은 뭐지, 참 희한하고도 낯선 성취감이다.
성취감이라니. 15년동안 컴퓨터 앞에만 앉아있던 내가, 시도 때도 없이 진상을 떠는 그 상사와 열정 넘치나 타협은 잘 모르는, 혹은 게다가 마음까지 여린 후배들 사이에서 내 일 뿐 아니라 그들의 갈등까지 중재해가며 애를 쓰면서도 성취감 보다는 자괴감이 뒤통수를 쳤던 순간들이 허다했는데, 지금 이 낯선 땅에서 내가 캘리포니아 롤에 깨를 뿌리며 느끼는 성취감이라니. 그 옛날 나의 생일에 아빠가 써줬던 편지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그래서 인생은 살아볼 만한 것이란다…. 그러게요 아빠. 참 살아보니 별 일이 다 있네요.
에이미 쪽을 흘끗 바라보니 샌드위치나 롤 혹은 커피와 머핀을 들고 줄을 선 사람들이 한바퀴 곡선을 그리며 길게 서 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는 공사현장에 출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사장님은 참 영리하게도 이제 ‘밥맛’을 알아버린 그들을 위해 치킨과 햄이 들어간 삼각김밥이나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샐러드 메뉴를 다양하게 준비해 놓았다. 그래서 그런지 다양한 인종의 단골 손님들이 끊이질 않는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인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풍경에 잠시 아연해지는 내게, 그들이 드링크를 집으러 냉장고를 향해 가는 길, 스시바를 지날 때 풍기는 갖가지 향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어젯밤 세탁기에 돌렸을 법한 섬유 유연제의 냄새를 풍기며 지나가던 백인 아저씨가 호쾌한 아침 인사를 건넨다. 공사 현장 조끼를 입었다. 에너지 드링크가 손에 들려 있다. 그 옆으로 청바지를 입은 여학생이 체리 블로섬 바디 스프레이 향을 풍기며 지나친다. 어떤 인도인 아저씨는 시끄럽게 통화를 하며 콜라를 집는다. 아침부터 팝이라니. 적당히 차려입은 금갈색 머리의 아가씨가 지나간다. 익숙한 향수 냄새가 스치자 코끝이 찡해졌다. 향기 때문이 아니라 향수 때문인가 보다. 내가 원래 아무렇지 않게 지녔던 그 자리와 그 향기에 대한 그리움.
상념에 빠지면 마음이 흔들리고 롤이 흐트러진다.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 다시 씩씩하게 시작하자. 어느덧 물밀듯 줄을 섰던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 한산해 지고 있었다. 이제 8시가 넘었나보다.
“Hey! Hey!”
갑자기 에이미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영문을 몰라 캐쉬어 쪽을 보니 에이미가 사라졌다. 당황한 나는 서둘러 텅빈 입구를 지나 밖으로 나가 보았다. 전철역 개찰구 앞에 크래커와 드링크 라면 등등이 나뒹굴고 있었고 에이미는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