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짜고짜 물을 내 놓으라는 아줌마의 ‘짧은’ 한마디에 나는 턱짓으로 ‘까딱’ 냉장고를 가리키며 “저기” 했다. 당황한 건 그쪽이었는지 사정없이 눈을 흘기며 뒷걸음질 쳐 가버렸다. 에이미의 말로는 그녀는 가끔 들러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사라지는 고정 진상인 것 같다. 저 사람도 아이들이 있을까. 왠지 그녀를 엄마로 둔 아이들이 더 측은해지는 것은 주제넘은 나의 오지랖인가. 누가 누구의 아이들을 측은해한다는 건가. 내 어린 두 딸들은 새벽부터 사라진 엄마의 빈 자리가 어느새 익숙해져 맛도 없어 보이는 시나몬 시리얼을 우유에 대충 말아 몇 숟가락 뜨고는 아직 꺼내지도 못한 채 드라이어에 들어있는 빨래 더미에서 옷 찾아 입고 터덕터덕 걸어 학교에 갔을 것이다.
가끔 아주 다급할 때 이런 문자가 오긴 한다. 엄마, 혹시 생리대가 어디에 더 있어? 전화기를 넣어 놓은 앞치마에 진동이 느껴지면 나는 얼른 주방으로 들어가 물을 튼다. 쌀을 씻든 그릇을 닦든 물이 받아지고 있는 몇초간은 난 내가 지불 받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일종의 양심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바쁘고 정신이 없어도 내 딸에겐 답을 해줘야 한다. 뭐든 말해주고 하트도 보내고 Have a great day라고 인사를 해줘야 나는 비로소 크라상과 파니니와의 씨름에 전념할 수 있게 된다.
딸. 나의 딸들에게 나는 어떤 엄마일까. 자식을 낳으면 엄마를 이해하게 된다는 보통 사람들의 말에 난 항상 코웃음이 나오곤 했다. 아이를 하나, 둘 낳을수록 더더욱 나의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꽤 오래 전, 11개월 딸아이를 어린이집에 처음 맡기고 돌아서던 날, 원숭이처럼 내게 달라붙어 울던 아이의 발버둥이 허리께에 아직 남은 채 출근한 뒤 모니터를 방패 삼아 하염없이 눈물 콧물을 쏟았던 그 아침을 잊을 수 없다. 그런데, 내 손으로 씻기고 입히고 재우고 먹여 보내도 이렇게 가슴이 쓰린데, 나의 엄마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나의 엄마는 항상 화려했고 나는 엄마 품이 아닌 할머니 곁에서 그런 엄마를 바라보던 기억이 대부분이다. 철제 사업으로 부를 쌓은 할아버지 덕에 유복하게 자란 외아들, 우리 아버지는 중학교 시절부터 맹렬한 구애 끝에 왕십리 뒷골목 가난한 집 막내딸을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그녀를 대학에 보내고 결혼을 하고 사업을 시작해 승승장구했다. 우리 세남매를 낳아도 손에 물 한방울 묻히지 않고 그녀는 항상 짙은 향수 냄새에 큰 귀걸이를 흔들며 아버지 회사에 이사란 이름을 달고 출근하고 있었다. 나는 아줌마가 싸준 코끼리표 보온 도시락 통을 열 때마다 엄마가 직접 정성들여 싸줬을 친구들의 밥통이 궁금하고 부러웠다.
그러나 그녀가 잘 하는 건 한가지 있었다. 기사아저씨가 모는 각그랜저를 타고 학교를 부지런히 오가며 육성회장을 도맡아 우리 삼남매를 저명하게 만들어버리는 일이었다. 그런 엄마를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난 가끔 그 사실을 이용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때부터 이미 이중성을 가진 나 자신을 약간은 경멸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어쨌든 난 엄마를 좋아하지 않았고 살가운 느낌이라곤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나를 보는 내 딸들은 어떤 기억을 만들어가고 있을까. 나는 내 엄마보다 나은 엄마이기는 할까.
이럴 땐 크라상을 자르고 터키햄과 치즈를 올려 크랜베리 소스를 넣는 이 단순작업이 차라리 복잡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자꾸만 머릿속이 꼬리잡기를 하듯 과거속으로 야금야금 들어가버리는 게 썩 유쾌하지 않기에. 상념을 털어내듯 도마 위 크라상 부스러기들을 박박 밀어낸다. 기다려, 여길 나가면 난 다른 사람이다. 이곳은 나의 미래와 과거가 혼재된 비밀 공간이다. 내가 살아가야 할 새 삶에서 잠시 숨어있을 빈 공간이기도 하지만 한편 이겨내야 한다는 의지에 가려져 방치된 감정의 사각지대이기도 한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