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미가 사라진 캐쉬어 자리 옆에 멍하니 섰던 내가 정신을 차린 건 에이미가 Transit Security와 함께 다시 나타난 순간이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곱슬머리를 가진 그 경비대원은 스카이 트레인 입구를 지키는 임무중 에이미와 친근한 사이로 잘 지내왔던 모양이다. 그는 에이미의 다급한 외침을 듣고, 좀도둑 치고는 너무 무모하게 많은, 간식이라기보다는 식량을 훔쳐 달아나던 그놈을 달려가 잡았고 경찰에 인계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서로 격려반 장난반 90도 절을 하며 감사의 인사를 나누는 그들 모습에 한도의 한숨이 나왔다. 직원의 아이폰을 훔쳐가 놓고도 다음 달에 삼각 김밥을 훔치러 다시 오는 백인 여자도 있고, 드링크 한개를 가방에 넣고 나머지 한개만 계산 하고 가는 신기한 인간들도 있다는 등. 말로만 듣던 좀도둑. 도둑이란 존재가 이렇게 가까이에 있어보기는 처음 아닌가.
아, 아니다. 아주 오래 전 대학 시절, 세상 물정 모르던 내게 약간은 충격으로 다가왔던 작은 사건이 떠오른다. 미대생이었던 나와 친구들은 과제가 있거나 밤 늦게까지 작품전 준비를 할 때면 작업복을 입은 채 학교 앞 작은 주점에 모여 술맛도 모르는 주제에 안주를 곁들인 저녁을 먹곤 했다. 레몬 소주에 베이컨 말이 꼬치가 참 맛있었던 곳. 그 2층이 우리의 아지트였다. 나무 계단을 올라가면 지정석이 있었다. 우리 넷은 언제나처럼 잠시 페인트와 실리콘 등 작업실 냄새에서 벗어나 힘든 작업 뒤의 작은 보상을 기다리며 희희낙락 수다를 벌였다.
그때 H는 아침에 받은 재료비를 벌써 거의 반이나 썼다며 울상을 지었다. 지갑을 열어 세어보며 17만원으로 이거 사고 저거 사고… 뭐 그런 얘기를 나눈 뒤 우린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전에 하나 둘 화장실로 우르르 내려가며 또 수다를 떨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다시 모여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고 멀쩡히 마무리 작업을 했다. 언제나처럼 밤 열시가 되자 수위 아저씨가 돌아다니며 불 끌거니까 어여 집에 가라 재촉을 하셨기에 우린 뿌듯한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었다. 다음날 아침에 만난 H는 울상을 지으며 어젯밤 멀쩡히 있던 17만원이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범인은 둘 중 하나였다. 난 아니니까 H와 나를 뺀 나머지 두 친구?
나머지 두 친구 중 하나인 J, 그녀에겐 전적이 많았다. ‘우리 셋’에 그녀를 받아줬던 건 어떤 사건 때문이었다. 그룹 프로젝트 발표일 갑자기 중요한 필름을 들고 사라진 그녀가 오후 늦게 이마에 큰 반창고를 붙이고 나타나 카페 유리창이 깨져 부상을 입고 병원에 다녀왔다는 변명을 하자 그 그룹에선 이미 들어봤자 거짓이라는 듯 이후 상종을 하지 않았고 다른 그룹에서는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아 전화를 걸자 엄마 목소리를 흉내내어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쇼에 아연 질색해 말도 섞지 않았다. 우리 셋은 멀쩡한 외모에 지적인 말투, 총명함까지 갖춘 그녀가 왜 그런 짓을 하고 다니는지 딱한 마음에, 그리고 따뜻하게 보듬어 고쳐보겠다는 어설픈 의기로 기꺼이 받아줬던 것 같다. 그러나, 거짓말에 도벽까지 겸비한 줄은 꿈에도 몰랐던 거다. 그런 캐릭터를 살면서 본 적이 었었기에. 학교와 화실만 오가며 범생이로 살던 우리들에게 그녀의 기행은 참으로 기이한 경험, 곧 작은 충격이었다.
20년 전 기억 소환으로 잠시 멍해진 내게 사장님의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아니, 튜나가 왜 이렇게 질퍽해!” 언제 오신거지? 평소 상냥하고 친근하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마요네즈와 배합이 맞지 않아 큰 튜나 한캔을 날릴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에 경악한 나머지 잔뜩 인상 쓴 얼굴빛이 마치 예전 회사 신입 시절 사보에 오타가 발견되어 인쇄 사고가 났을 때의 팀장 얼굴을 보는 듯 했다. “아, 제가 좀 더 짜낸 뒤 고쳐볼게요” 믹싱 보울을 들고 싱크대로 향하는 내 뒷모습을 유체이탈 한 듯 내가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 어디에서도 명문대 출신에 버젓한 회사 경력을 가진 과거의 자신감 따위는 먼지 한톨 만치도 찾아볼 수 없었고 자존감이 바닥에 눌어붙어 떨어지지 않는 듯 무거운 발걸음을 휘적휘적 옮겨놓는 중이었다.
튜나를 양손에 뭉쳐 꼭꼭 짜낸다. 희미하게 빠져 나가는 갈색 참치 기름 위로 뜨끈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나는 왜 이곳에서 눈물을 짜며 참치를 짜내고 있는가.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