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설렘 이자, 그 땅의 숨결을 영혼으로 들이마시는 교감의 순간이다. 그러나 진정한 여정은 찻잔 속에서 시작되곤 한다. 뜨거운 물이 찻잎을 깨울 때, 그 나라의 풍경과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내 안으로 스며드는 듯한 경험. 나는 티 블렌더로서 세계를 여행하며 만난 수많은 티 중에서도, 유독 마음을 붙잡은 “다섯 나라의 다섯 가지 차”에 담긴 이야기를 풀어내려 한다. 이 다섯 잔의 차는 단순한 액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다섯 가지 세상을 의미했고, 그 땅의 역사와 문화를 엮어내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실타래였다.
1.모로코의 민트 티(Mint Tea): 사막의 달콤한 멜로디
모로코 마라케시의 미로 같은 골목에서 만난 민트 티, ‘앗타이'(Attay)는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식지 않는 환대의 연금술이다. 은쟁반 위 녹차와 신선한 민트, 그리고 설탕이 만나 머리 위에서 시원하게 따라져 내리는 그 모습은 하나의 춤과 같아 보였다. 또한 티 블렌더의 눈에 보이는 것은 이들이 차를 통해 나누는 깊은 인간적 유대이다. “첫 잔은 삶처럼 쓰고, 두 번째 잔은 사랑처럼 달콤하며, 세 번째 잔은 죽음처럼 부드럽다”는 세 잔의 비유를 음미할 때, 이것은 사막의 건조함을 넘어선 모로코 사람들의 따뜻한 심장이다.
2.인도의 마샬라 차이(Masala Chai): 생동하는 혼돈의 불꽃
인도 델리 시장의 혼잡하고 생동감 넘치는 공기 속, 작은 종이컵에 담긴 마샬라 차이는 그 자체로 인도의 심장 소리였다. 홍차, 생강, 카르다몸, 계피가 우유와 함께 끓여져 피어나는 강렬하고 혼란스러운 향. 그 한 모금은 복잡 다단한 인도의 문화, 억척 같지만 뜨거운 생명력을 가진 삶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이 티는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공평하게 제공되는 음료이다. 차이왈라의 손에서 건네지는 뜨거운 잔에는, 힘든 하루를 견디게 하는 삶의 향신료이자, 인도인의 뜨거운 열정이 응축된 친절함이 담겨 있다.
3.영국의 얼그레이(Earl Grey): 회색 하늘 아래의 우아한 숨
홍차 문화의 우아한 정점에 선 영국 런던. 회색 빛 하늘 아래 마주한 얼그레이 한 잔은 단순한 홍차가 아닌, 품위를 지키는 작은 의식이다. 중국 홍차에 베르가못의 이국적인 향을 입힌 이 티는,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영국인의 일상에 스며든 우아한 사교의 무게를 보여준다. 오후 네 시, ‘애프터눈 티타임’에 찻잔을 들고 나누는 대화는 사교를 넘어 일상 속의 품위를 지키는 영국만의 고유한 낭만이고 여유로운 내면을 상징하고 있다.
4.일본의 센차(煎茶): 정적 속의 ‘일기일회(一期一会)’
가마쿠라의 고즈넉한 다방에서 마신 센차는, 일본 문화 특유의 정갈함과 섬세함 그 자체였다. 찻잎의 새순을 쪄서 만든 녹차인 센차는 차도(茶道)라는 엄격한 예술로 승화되며, 와비사비'(Wabi-Sabi, 불완전함의 아름다움)의 미학을 대변한다. 다도 예절 속에서 느끼는 맑고 투명한 한 잔의 센차는, 마치 명상과 같다. 한 모금을 마실 때마다 자연의 순수한 맛을 존중하며, 차를 내리는 동작의 품격 속에 ‘일기일회(모든 만남은 단 한 번뿐이니 소중히 여겨야 한다)’라는 깊은 삶의 철학을 깨닫게 된다.
5.한국의 연잎차(Lotus Leaf Tea): 고요한 사색의 맑은 뿌리
마지막으로 한국의 연잎차이다. 진흙 속에서도 맑은 꽃을 피우는 연처럼, 연잎차는 선비 정신과 불교적 청정함의 상징이며 한국 차 문화의 따뜻한 뿌리이다. 덖어낸 연잎 특유의 은은하고 고요한 향은, 모든 번뇌를 잠재우고 마시는 이에게 고즈넉한 평온함과 사색의 시간을 선사한다. 맑고 흐린 연둣빛 차를 마시는 동안, ‘선(禪)과 차(茶)는 하나다’라는 정신적 의미를 깊이 이해하며, 바쁜 일상 속에서 오늘의 나를 발견하게 하는 힐링의 순간이다.
♦ 티 블렌더로서, 내가 본 차의 세계
세계를 돌며 마신 다섯 잔의 차는 단순한 여행 기록을 넘어, 나의 인생 티 블렌딩 작업에 영원한 영감이 되었습니다. 모로코 “민트 티”의 뜨거운 환대는 한국 허브티의 상쾌한 블렌딩에, “마살라 차이”의 강렬한 향신료는 건강차의 깊이와 생명력에, “얼그레이”의 우아함은 현대적인 블렌딩의 세련됨에 스며들었습니다. “센차”의 정적은 차를 내리는 동작의 품격을 일깨웠고, “연잎차”의 고요한 기억은 한국 차의 감성과 뿌리를 지키게 했습니다. 저는 지금 이 영감들을 담아, “전통 허브”와 “현대적 레시피”를 잇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블렌딩 조합의 중심에는 “한국적 재료를 어떻게 새롭게 해석할 것인가” 라는 질문이 자리합니다. 가을의 국화, 겨울의 생강, 여름의 연잎등 한국의 자연이 선사하는 재료들은 제 작업실에서 늘 새로운 이야기로 피어납니다. 감미로운 찻잔을 통해 늘 세상의 이치를 배웠고, 그 세상의 이야기는 다시 새로운 티 블렌딩으로 피어나 지금도 세계를 향해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