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February 3,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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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본 공은 없다더라만

김아녜스 / (사) 밴쿠버 한국문협 회원

정차한 통근열차에서 노란 프리지아 한 다발을 안고 달려오는 며느리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아른거렸다. 아, 봄이구나. “미나야, 엄마 온다!”

부모님께 받은 가장 큰 유산이 튼튼한 체력과 강한 의지라고 믿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내 생애에 과부하가 걸린 순간은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마흔 즈음, 고등학교 2학년 학년주임과 야간 대학원을 병행하던 시절이었다. 하루 네 시간 남짓한 수면, 운전 중 스르르 감기는 눈, 수업 중 책을 떨어뜨리며 퍼뜩 정신을 차리곤 했다. 승진을 위한 스스로의 선택이었기에 자업자득이라 여겼지만, ‘왜 이 고생을 하나’ 싶어 머리를 쥐어박기도 했다. 그래도 견뎠다. 체력과 의지가 나의 강점이었으니까.

두 번째는 손녀 미나가 태어난 순간부터 시작된 여정이었다. ‘A Star Was Born’가족의 의미가 더욱 깊어진 순간이었다. 허허벌판 같던 이민 생활에 강력한 아군 하나를 얻은 셈이라 내심 흐뭇했다. 하지만 며느리의 복직을 앞두고 “누가 아이를 볼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환갑도 되지 않은 내가, 냉장고도 번쩍 들고 쌀 포대도 척척 옮기던 그 체력으로 손을 들었다. “그래, 내가 키운다.” 세 식구가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내 손으로 내 아이를 키우지 못했으니, 이제라도 생명을 돌보는 기회를 주신 공평하신 하느님께 감사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아침엔 도시락 두 개를 싸고, 이유식을 준비했다. 하루 종일 안고, 업고, 먹이고, 놀고, 노래하고, 재우는 일상.

나와 손녀만의 세상이었다. 그래, 나의 어머니도 내 아이에게 이리 하셨겠지. 어머니 덕분에 27년의 공직 생활을 무탈하게 마칠 수 있었음을 떠올리니, 그 빚을 갚고 있다고 생각하니 사무치게 그리웠다. 해가 어디서 떠서 어디로 지는지, 계절이 언제 바뀌었는지도 몰랐다.

저녁에 부엌을 정리하고 방으로 올라가면, “편히 쉬세요” 라는 며느리의 인사말이 머리 위로 맴돌았고, 다리는 천근만근처럼 무거웠다. 내가 이 나이에 무슨 덕을 보겠다고 이러는 걸까? 이유는 단 하나, 자식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하니까.

그러나 ‘애 본 공과 새 본 공은 없다’더니, 혼비백산할 일도 몇 번, 그때마다 십년 감수했다. 유아용 의자에서 놀다 유치가 빠져 피가 나자 “아이구, 내 새끼, 이걸 어떡해” 하며 들쳐 업고 동네 치과로 뛰었다. 그사이 피는 멎었고, 할머니 등에서 리듬을 느낀 손녀는 신이 나 있었다. 빠진 이를 예쁜 함에 담아 “이빨 요정이 가져가길”

기도하던 그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수영장에서 냅다 달아나는 아이를 부르다 미끄러져 넘어지기 일쑤였고, 어느 날은 샤워실 손잡이에 팔이 끼어 샴푸를 들이붓고 돌려 겨우 빼냈다. 그때의 기지를 손녀는 지금도 기억하며 “우리 할머니 대단했지!” 라며 웃는다. 손녀가 자라며 제집에 가기 싫어 울던 날도 많았다.

밤새 설사하는 아이를 업고 달래며 차라리 내가 아픈 게 낫겠다고 되뇌었다. 그래도 도서관 스토리타임은 빠지지 않았다. 콩알만 한 손녀를 제일 앞에 앉히고, 나는 눈이 마주치는 자리에 앉았다.

프리스쿨에 들어가면서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 엄마 대신 학예회에 참석해 노래하고 춤추는 손녀를 보며 가슴이 저릿했다. ‘사는 게 무엇일까’ — 그렇게 묻던 순간이었다.

손녀는 총명하고 밝았다. 주말마다 집에 오면 “할머니~~~”하며 온동네가 떠나가게 소리치며 달려왔다.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할머니의 도깨비방망이는 언제나 뚝딱이었다. 하늘의 별도 따다 주던 할아버지를 천국으로 보내는 날, 손녀는 오보에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연주했다. 이제는 클래식 밴드의 오보에와 피아노, 재즈 밴드의 색소폰 연주자가 된 열다섯 살 미나. 나이만 늘었지, 아직도 밤에는 “할머니, 등 긁어줘”하며 잠투정을 한다.

연구에 따르면 할머니가 키운 아이는 정서적 안정감과 생존력이 높다고 한다. 유전자의 공통분모때문이라지만, 나는 굳이 그런 설명이 필요 없다. 내가 온마음과 정성으로 키웠으니 그 자체로 충분하다.

“어머니, 미나가 썸머스쿨에서 수학 백 점 받았어요.” “아이구, 내 새끼 잘했네.” 애 본 공이 있든 없든, 할머니의 눈에는 그저 예쁘고 사랑스러운 손녀, 그 봄날의 프리지아처럼. 황혼을 아낌없이 쏟아부은 그날들이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계절이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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