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August 1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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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

김한나/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마지막은 당신이 내게 이별을 말했잖아.”

“내가, 정말 그랬어?”

그는 잊고 있었다. 나는 다 기억하고 있는데. 그날의 공기에서 느껴지던 질감, 그에게 내리던 빛과 그림자의 지점, 그 장소에서 보이던 시각적인 조각들이 모두 대화와 어울려잘 찍힌 사진처럼 남아있다. 사람 좋은 얼굴로 입꼬리를 치켜올리면 눈이 작아지는 그의웃음은 여전했다. 샤브샤브 건더기를 건져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내 앞에 먼저 놓아주었다. 이럴 때 기억을 촘촘하게 글로 써두는 버릇이 억울하다. 써 놓은 글 속의 장면은 잊을 수가 없다. 매번 나만 기억해.

기록학자 김익한 교수는 시간이 흐른 후 기억을 소환해 관련 단어를 떠올리기만 해도 ‘생각력’이 깊어져 사건이나 내용을 기억할 수 있는 범위와 깊이가 무궁무진하다고 한다. 거기에 글로 써서 기록으로 남기면 그건 최고의 학습 방법이라고까지 말했다.

글을 쓰기 위해 기억을 소환하는 작업을 매일 한다. 대화 속에서 인상적이었던 상대와 나의 말, 그때 분위기와 장면을 떠올리며 글감을 찾는다. 챙겨야 할 가족이 많지 않은 단순한 일상에 예민한 기질까지 더해져 나는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생생히 기억한다. 파워 계획형은 아니지만 타인과 엮인 일정은 세 군데 기록하니 잊거나, 늦거나 하는 일이 많지 않다. 약속장소는 5분 전에 도착해야 마음이 편하고, 자주 없는 일이지만 내가 늦으면 미안한 마음에 동동거린다. 타인에게 피해주기 싫어하는 성격은 타인에게 동일한 기대로 이어진다. 오랜 시간 정확성을 요구하던 학교 업무와 책임감이 시간엄수라는 강박으로 발전된 것 같다.

문제는 예상치 못한 ‘변수’가 폭력적으로 다가온다는 데에 있다. 결정을 자주 미루거나, 약속하고 잊는다거나, 시간이 정확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심한 상처를 받는다. 약속 시간10-20분 정도 늦는 것을 당연히 여기거나, 약속 시간이 다 돼서야 출발한다는 연락을 받으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시간에 맞추어 모든 준비와 세팅을 끝내 놓고 손님이 오면, 기다림 없이 식사할 수 있게 하는 게 당연한 예의인 줄 알았다. 그래서 예고 없이 10분 이상 늦으면 불안하고 초초하다. 정성껏 준비한 시간을 나만큼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표현 같아 불쾌하기까지 하다.

그러다 보니 나와 다른 성향의 이들을 만날 때 긴장한다. 매번 늦는 걸 감안해 천천히 준비한다 해도 늘 제시간에 도착하고야 만다. 한번 한 약속이 유효한지 아닌지 매번 확인해야 하는 과정도, 쉽게 약속을 취소하는 패턴도 피곤했다. 기다림과 모호함에 무뎌지는 대신 나의 인내심의 한계가 줄어들었다. 이해 못 하는 나도, 매번 늦거나 약속을 흘려 보내는 그도 서로 변하지 않았다. 삶을 운영하는 방식이 너무 달랐다.

분명 내가 받는 스트레스가 더 크다 생각하지만, 이런 기질이 누군가를 얼마나 숨 막히게 했을까. 내가 좀 더 유연하고 이해심이 깊었다면 그냥 넘어갈만한 일이었을까. 하지만 내 마음은 딱 ‘요만큼’이라 제 성질 죽이지 못하고 끙끙 앓고 있으니 이제 우리 서로 상처받지 말고 각자 잘 살면 된다, 고 스스로 위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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