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December 2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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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

정효봉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삼촌! 무섭단 말이야, 하지 마.” 겁에 질려 소리치는 나를 삼촌은 억지로 소 등에 태웠다. 나는 싫다며 등 위에서 발버둥 쳤다. 삼촌은 내 몸을 꼭 잡고 소 등을 탁탁 두드리면서 “조금만 있어봐. 재밌을 거야.” 하고 내 볼을 두 손으로 비벼댔다. 이때 소가 고개를 돌려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큰 두 눈을 껌벅이며 마치 내게 “무서워하지 말고 삼촌이 시키는 대로 해 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소 얼굴을 한참 쳐다보니 소도 내가 싫진 않았는지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나는 마음의 안정을 찾고 소 등에서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의 높은 등에서 내려다보이는 마을과 하늘은 새로워 보였다.

난 초등학교 입학 전 시골 할머니 댁에서 자랐다. 유달리 할머니와 삼촌을 좋아해서 할머니 댁에 지내기를 원했었다. 당시 막내 삼촌은 군 제대 후 복학 준비를 하며 집안일을 돕고 있었고, 할머니는 홀로 농사를 지으시며 삼촌 학비를 마련할 요량으로 소 한 마리를 송아지때부터 키우고 계셨다. 삼촌은 소 외양간 옆 작은 사랑방에서 기거했다. 나는 삼촌과 함께 지내며 소와 함께하는 생활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다. 삼촌은 매일 새벽 소를 끌고 나가 꼴을 먹였으며, 오후에는 사랑방 아궁이 가마솥에 쇠죽을 써서 소를 먹이곤 했었다. 나도 화창한 날에는 삼촌과 함께 소에게 다가가 꼴을 먹이곤 하였다. 쉴 새 없이 묵묵히 열심히 일하는 소를 매일 지켜보며 고마운 마음과 애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삼촌은 이 소에게 ‘황우’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중국 초한지의 ‘역발산기개세의 항우’처럼 힘이 세고 강했지만, 포악하지 않고 유순하며 유달리 진한 노란 털을 가진 소였기에 ‘황우’라고 지었다고 설명해 주었다. 나도 “황우야, 황우야! ” 라고 부르며 그 소를 점점 더 좋아하게 되었다. 황우와 함께 밭에 나가는 날이면 나는 황우 얼굴을 어루만지고 내 볼에 비벼대며 따뜻함과 정감 넘치는 대화를 나누곤 하였다. 나의 시골 생활에 황우는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어느 날 황우에게 꼴을 먹이고 돌아오는데, 할머니가 마을 이장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삼촌이 인사하며 안부를 물으니, 이장님이 웃으시며 “ 대학 복학하면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 되어야 한다.” 하시며 자리를 뜨셨다. 바로 할머니께서 “인자 누렁이 팔아야 쓰겄다.” 하시며 삼촌을 쳐다보셨다. 누렁이는 바로 황우를 말하는 것임을 나는 바로 알아챘다. 삼촌은 이미 각오한 듯 “언제 오는데요? “하고 물었고, 할머니는 “이틀 뒤 ….”라고, 짤막하게답하셨다. 나는 어렸지만 대충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었다. 삼촌은 황우에게 다가가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녁 식사 때가 되었지만 삼촌은 밥 생각이 없다며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삼촌 맘을 아시는 듯 나를 데리고 삼촌 방에 가서 “누렁이 팔고 다른 송아지 한 마리 사면 될 것 아니냐? “ 하시며 삼촌을 달래셨다. 삼촌은 “인자 소 안 키울랍니다! “하며 외양간 소 앞에서 한참을 울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었던 나도 덩달아 소리쳐 울었다. 이를 보시던 할머니 역시 아무 말씀 없이 그저 바라보며 속상해하셨다. 이틀 뒤 내 친구 황우는 이른 아침에 어디론가 팔려 가고 말았다. 한동안 난 친구를 잃고 슬프고 허전했던 마음으로 힘들어했다. 그 후 삼촌과 난 시골을 떠나 삼촌은 대학에 복학하고, 난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황우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지워져 갔다.

갑자기 황우가 화난 표정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중학교 미술 시간 교과서에 나온 ‘이중섭의 소’ 그 작품을 보고 난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알고 있는 황우는 순하디순하고 항상 평화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특히 큰 눈을 껌벅일 때마다 천천히 움직이는 속눈썹에서 편안함이 느껴지는 그런 소였다. 하지만 이중섭 화백의 소는 맹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성난 얼굴로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그 소는 금방이라도 튀어나와 나를 공격할 것만 같았다. 이중섭 화백의 힘찬 붓놀림으로 그려진 휘어진 소의 등은 내가 올라탔던 편안하고 따뜻한 황우의 등과는 완전히 달라 보였다. 순하고 착한 소를 왜 이중섭 화백은 이렇게 무섭게 그렸는지 궁금해졌다. 다음 날 미술 시간에 이중섭 화백의 소는 왜? 무서운 소로 표현되었는지 선생님께 질문했다. 선생님께서는 소가 온순하고 차분하며 인간에게 순종적이라는 것은 일종의 고정관념이라고 하셨다. 예술작품은 당시 작가가 처한 상황이나 작가의 의도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되며, 같은 사물일지라도 작품을 보고 느끼는 관람자의 감정에 따라서도 작품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소’와 ‘이중섭 화백의 소’가 무엇이 다른지 연구해 보라고 숙제를 내주셨다. 이중섭 화백이 살았던 시대는 일제 강점기를 지나 남북 사상이 혼란했던 때였고, 작가 개인적으로도 어려운 환경을 겪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중섭 화백이 그렇게 무섭고 강인한 소를 그렸을 것이라고 짐작만 했다. 나는 많은 자료를 찾아보고 고민해 봤지만,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대충 숙제를 제출했다. 그날 저녁 문득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 황우가 생각나 삼촌에게 황우 이야기를 꺼냈다. 삼촌은 그 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냐며, 황우를 생각하면 고마운 마음뿐이라고 덤덤히 말했다. 사법시험공부를 하고 있었던 삼촌은 도서관에 간다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난 그런 삼촌이 왠지 서운했다. 황우가 팔려간다고 했을때 나와 함께 서럽게 울던 삼촌이었는데,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한동안 황우와 함께 지냈던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보니 마음 한구석이 찡했다.

캐나다로 이민 온 후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북부와 알버타주를 여행하는 기회가 많았다. 특히 알버타 대평원의 큰 목장을 지날 때면 끝없이 펼쳐진 초원에서 소 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외양간에서 키우는 한국의 소와는 달리 캐나다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소가 무리를 지어 여기저기서 평화롭게 목초를 즐기고 있었다. 알버타 여행중에 소 한 마리를 가까이 보고 싶어 잠시 차를 몰아 목장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비포장도로로 한참 들어가니 목동들이 보였고, 그들의 안내로 장화를 신고 목장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검고 진한 갈색의 소 몇 마리가 나를 쳐다보는데, 그 소의 첫인상은 무서웠다. 시커멓게 무장을 한 검은 소가 내게 다가올 때, 마치 이중섭 화백의 공격적인 소의 모습과 비슷해서 흠칫 놀랐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옆에 있던 건초를 손으로 먹여 주니 그 소는 길고 두툼한 혀를 날름거리며 맛있게 받아먹었다. 찬찬히 검은 소의 얼굴을 쳐다보니 갑자기 순하디순한 황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예전 어릴 적 볼을 비벼대며 등위에 올라탔던 내 친구 황우가 나타 난 것 같았다. 검은 소가 나를 쳐다보며 천천히 두 눈을 껌뻑일 때, 마치 얼른 등 위에 올라 타 보라고 말하던 그때의 황우 같아 보였다. 소의 표정이 한없이 평온하고 순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때로는 눈을 부릅뜨고 무섭게 쳐다보는 것 같기도 하고…각자 처한 환경과 상황에 따라 사물을 보고 느끼는 시각이 달라질 수 있다는 중학교 미술 선생님 말씀이 생각났다. 캐나다 알버타 검은 소의 거칠고 무서운 얼굴에서 평화롭고 순한 황우의 모습을 본 것은, 어릴 적 시골 생활처럼 지금 나의 삶이 자연스럽고 평온하기 때문이 아닐까?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니, 눈이 부시게 푸른 하늘이 자연과 함께 공존하고 있는 나를 축복하고 있는듯했 다. 끝없이 펼쳐진 초록빛 초원에서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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