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가 내뱉은 것이든 그저 흘러다니는 서양 속담일 뿐이든, 이 얼마나 훌륭하나 당연하고 게다가 감흥 없고 식상한 문장이란 말인가. 그러나 난 오늘도 이 말을 곱씹고 되뇌이며 눈꺼풀에 붙은 잠을 떼어내고 있다.
새벽 5시, Granville 전철역은 아침이 오기 전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분주한 발걸음으로 깨어나기 시작한다. 선선한 이른 아침 공기를 한모금 마신 뒤 뒷문을 빼꼼 열고 들어가면 언제나처럼 굿모닝 인사를 건네는 저쪽 캐셔 자리의 에이미. 그녀는 나보다 더 일찍 나와 문을 열고 정리를 마친 뒤 이미 든든하게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내게 그곳의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에너지를 선사하는 두 존재, 에이미 그리고 커피.
난 스윗한 인사와 함께 Dark Roast 커피를 한바가지 따라 담으며 오늘의 내 숙제를 스캔하기 시작한다. 입구에 들어서면 꽃과 머핀 등 스낵과 커피가 차려진 옆으로 에이미의 구역, 복권과 계산대가 자리하고 그 앞에 바로 내가 오늘 여덟시간동안 쉼없이 채워나가야 할 진열용 냉장고가 날 기다리고 있다. 터키와 햄앤 치즈 등 5가지 샌드위치에 meat ball과 치킨 데리야키 등 6가지 sub, 삼각김밥에 각종 샐러드 그리고 캘리포니아 롤에 스페셜 롤까지 다양한 메뉴들이 어떤 줄은 빼곡히 어떤 줄은 한두개가 덩그라니 남아 내게 말을 걸어온다. 어쩔래… 얼른 채워라…
첫 면접을 보러 왔던 날, 샌드위치나 롤은 고사하고 대학생 때도 그 흔한 카페 알바 한번 안해본 내가 이 나이에 무슨 용기로 이곳에 지원을 했는지, 참 의아하면서도 신기하게 날 바라보던 사장님의 눈빛이 생각난다. 게다가 나의 요구받지 않은 자백에 웃기까지 하셨다. “주부 경력 15년이지만 한국에서 직장생활만 하다 와서 살림도 잘 못한답니다.”
“그런데 여긴 할 수 있겠어요? 만만치 않을텐데…” 어이없어 하는 사장님 면전에 난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말했었다. “네 그러게요. 저 뽑지 마세요. 뭐든 끈기있게 배우는 성실성은 있지만 그래도 제가 잘 못해서 혹시 폐가 되면 안되니까요”
훗날 에이미에게 듣기론, 사장님은 나의 그 말에 많이 고민했다고 했다. 그날 총 네명의 지원자가 면접을 봤었는데, 그 중 유력했던 주방 이모 포스를 풍기던 분을 뽑아야 할지 아무것도 못하게 생겼는데 왠지 정말 성실하기만 할 것 같은 나를 뽑는 모험을 할지를 두고 말이다. 그런데 다음날, 내게 일단 일주일에 이틀씩만 해봐도 괜찮냐는 문자를 보내버리신 사장님이 그동안 많이 후회하지 않으셨기를 바랄 뿐이다. 이미 나도 도망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거다. 주방 이모를 내치고 뽑으셨는데 약속했던 성실함이라도 보여드려야지.
그렇게 나의 모험인지 도전인지가 시작되었고, 초짜로서 정말 외우기 힘들었던 많은 메뉴의 레서피를 노트에 적어가며 우왕좌왕 하기를 한달, 두달이 지나고 어느정도 이것저것 익혀가기 시작하는 중이다.
자, 힘을 내. 여긴 내가 나고 자란 땅이 아니란다. 난 이제 더이상, 매달 월급이 통장에 따박따박 꽂히던 직장인이 아니며, 후배들과 회의를 하고 회식을 주관하던 고참 선배도 아니다. 난 그저, 육아휴직 삼아 1년 살기로 왔던 밴쿠버의 삶에 매료된 웬수같은 남편과 두 딸래미 덕에 여기 눌러앉게 된, 영어도 어설프고 나이도 어중간한 신규 이민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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