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둡고 눅눅한, 전형적인 12월 밴쿠버의 비 내리는 겨울 거리. 20여분을 족히 헤매다가 리치몬드 동쪽 캡스탄길에 있는 M사장 딸의 돌잔치 장소 인 중국음식점을 찾았다. 준비된 원형식탁이 10여 개쯤인 것으로 보아 100여명은 초대한 것으로 보였다. 고급 포도주와 랍스터가 곁들어진 정찬(Full Course)요리가 나올 거라고 해서 아하 이 친구가 꽤나 돈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이구나 생각하면서 나는 심사가 좀 틀어져 있었다.
M사장을 처음 만난 것은 1년여 전이었지만 나는 그를 잘 몰랐다. 더구나 그에 대한 첫 인상은 제사상 깎은 밤처럼 깔끔하면서도 차가워 정(情)도 뭣도 없는 듯 보였다. 그런데도 부부동반으로 그 딸의 돌잔치 초대를 받고 나니 다소 찜찜한 것은 사실이었다. M사장 때문에 내가 금전적으로 손해를 보거나 명예를 훼손당하거나 한 적은 전혀 없었다. 그에 대한 편견은 무어랄까,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그가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치졸한 시기심 때문이었다.
우선 그는 젊었다. 나보다 무려 스무 살이 넘게 젊은데 나보다 부자였다. 밴쿠버에서 제법 큰 금융 및 투자 대행사를 가지고 있었고 좋은 차를 소유하고 있었다. 미국 동부의 유명 의과대학을 졸업한 수재였고 야망도 있었다. 내가 그의 나이 때는 겨우 은행 대리로서 소형아파트 하나 분양 받고 뛸 듯이 좋아라 하였는데 그는 리치몬드에 큰 집을 소유하고 있었고 금융업으로 캐나다뿐 아니라 한국, 중국 및 북미진출을 꿈꾸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부모의 도움 없이, 의과대학 출신으로서 장래가 보장되는 경력을 과감하게 버리고, 밑바닥 보험판매원으로부터 시작하여 이루어 낸 것이었다. 나는 그의 그러한 이력을 알고서는 내가 중학교 때 미국에 이민 올 수 있었더라면 나도 그 정도는 되어 있었을 것이라 는 자기변명을 하면서도 그를 볼 때마다 부러움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와는 별로 친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최근 공식석상에서 자주 만나다 보니 그도 나의 대강 이력을 알게 되었고 관심을 가지는 듯해 보였는데 필시 그것이 나를 딸의 돌잔치에 초대하게 된 빌미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시간이 되니 식당 안은 중국, 일본, 인도, 한국사람 및 백인 캐나다사람들로 가득 채워졌다. 대부분 그가 소유한 회사의 직원, 고객, 연계회사 사람들과 친지 및 친척인 듯했다. 모두가 인형이랑 장난감이랑 선물을 들고 와서 접수 대 위에 놓고서는 왁자지껄, 시끌벅적, 웅성웅성 야단들이었다. 나로서는 어쨌던 캐나다에서 처음 보는 돌잔치였으니까 호기심이 없지 않았다. 나중에 손주가 생기면 우리도 치러야 할 일 이니까 아내와 나는 이것저것 자세히 봐 두기로 했다.
한국처럼 상석에 돌잔치상을 마련해 두었는데 떡, 과일, 과자 등을 수북이 쌓아 두었다. 아마도 한국 돌잔치처럼 그 앞에서 아이가 무엇을 집으려니 하고 생각했다. 지폐나 공책이나 실, 또는 장난감 등이 보이지 않아서 저게 도대체 어느 나라 식 상차림인가 궁금해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기다려도 아이의 미래를 점친다는 한국관습인 돌잔치상 재물 집기는 없었다. 곧 식사가 나와서 이번에는 돌잔치 손님들에게 어떤 음식이 제공되나를 살피고 있었는데 갑자기 좌중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돌잔치상 뒤편의 스크린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다.
“어 ——-“
스크린을 보는 순간 아내와 나는 말문을 잃었다. 돌잔치의 주인공인 M사장 딸의 병원에서 갓 태어날 때의 모습이 거기 있었는데, 코, 입, 가슴, 허리에 온통 튜브가 연결되어 있었다.
“보시는 것처럼 제 딸은 한쪽 폐가 미성숙한 체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콩팥이나 창자 등 장기가 아래로 쳐져 있어서 태어나자 마자 위로 끌어 올리는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회복될 때까지 한참을 병원에 있다가 퇴원하였지만 아직도 입으로 식사를 하지 못해서 허리에 구멍을 뚫고 유동식을 위장으로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애써 태연하게 하는 그를 보며 그의 심정을 헤아려 보았다.
사실 사생활이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를 약간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의 아내와 미국 LA 한 고등학교 동급생으로 전교 수석, 차석을 다투는 경쟁자였다고 한다. 물론 서로 좋아하는 감정도 있었을 것이다. 졸업하고 그는 의과대학, 지금의 아내는 법대 등 서로 다른 도시로 진학하였고 그 후로도 제각기 갈 길을 가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LA로 돌아와 보니 지금의 아내는 그때까지 결혼하지 않고 은근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결혼했는데 이상하게 몇 년간 아이가 생기지 않다가 30대 중반에 오늘의 첫 딸을 가지게 된 것이다.
“마음 아프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요. 그러나 제 딸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제 딸이 어떤 상태로 태어났건 그건 관계치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척이나 제 딸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딸이 건강하고 현명하고 아름답게 자라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그래서 아이를 가지고, 그 아이의 돌잔치를 할 때를 꿈꿉니다. 그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저희는 그렇게 키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이 보살펴 주시는 현명하고 아름다운 아내의 표본인 ‘아비게일(후에 다윗 왕의 아내가 됨)’을 제 딸의 영어이름으로 정했습니다.”
아. 그랬구나. 순간 나는 깨달았다. M사장이 왜 그 많은 사람들을 초대했는지. 왜 고급 포도주와 랍스터가 나오는 비싼 식당에서 돌잔치를 하게 되었는지. 왜 온통 튜브로 온 몸이 감긴 아이의 모습을 영상으로 남겨 두었는지.
그는 아버지서의 사랑을 만인 앞에서 다짐하려고 했던 것이다. 아이가 정상적으로 태어나지 못했을 경우 흔히 부끄럽게 생각하고 아이의 출생을 숨기거나 제대로 축하조차 하지 않으려는 부모들이 많은데, 그는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우면서 온갖 재롱을 떨기 시작해야 하는 돌바기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에 감사하고 그 딸을 아비게일처럼 건강하고 현명하고 아름답게 자랄 수 있도록 온 사랑을 다 바쳐 양육할 것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표하려고 했던 것이다.
누군가의 선창에 의해 ‘Happy Birthday Abigale(아비게일아. 생일을 축하한다)’의 노래가 온 식당 안에 울려 퍼졌다. 딸에 대한 M사장의 사랑에 나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행복하게 자라거라. 아비게일아. 너의 첫 생일을 모두가 축하하고 있단다.
모두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순간 아비게일은 M사장만의 딸이 아니라 참석한 사람 모두의 딸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