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December 2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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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빌역의 새벽을 여는 사람들 6

이 일상의 기록을 손에서 놓은지 몇일이나 되었을까. 새 Time Sheet에 근무 시간을 기록하며 문득 깨달았다. 어느새, 12월이라니. 그 여름 작은 콘도의 통유리를 달구던 뜨거운 태양을 버거워하며 들이키던 몰슨 캐네디언의 맛 그리고 나와 상관없이 청명하게 빛나던 하늘을 보며 울컥 서러움이 몰려왔던 그날의 느낌이 아직도 선명한데.

오늘의 새벽은, 눈을 뜨고 싶지 않을만큼 우울했다. 4시 40분, 알람 소리가 내 삶처럼 처절하게 반복적으로 울려댔고, 나는 신경질적으로 알람을 끈 뒤 전화기를 어딘가에 던져버리고는 다시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나를 지탱해오던 모든 결심 그리고 항상 그래왔듯 다 이겨낼 수 있다고 최면을 걸어왔던, 나의 의지 따위와는 상관없이. 나는 그냥 그대로 무너져내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순간만큼은, 게으르고 책임감 없으며 다시 시작하겠다는 결심같은 건 하루 지나면 잊고 마는 속편한 인간으로 살고 싶어졌는지도 모른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고도 남은 날들을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아가는 일상을 책으로 낸 어느 저자는 말했지. “돌아갈 곳이 없어졌으면 그냥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어디로, 어느 곳을 향해 나아가란 말인가. 아무것도 참아내지 않아도 될, 그저 다시 눈 뜨지 않아도 될 그 순간을 부표삼아 허우적거리며 헤엄치는 내 모습이 싫어 멈춰버리면 어떻게 되는 걸까.

다시 눈을 감았다.

스무살 나는 열병을 앓고 있었다. 불덩이처럼 뜨거운 몸이 침대밑으로 빨려들어갈 것 처럼 녹은 듯 축 늘어져 있었고 이따금 정신을 차리려 눈을 뜨면 침대 발치에 서있는 그 형체에 소스라치게 놀라 다시 의식을 잃곤 했다. 깜깜한 벽과 침대 사이로, 달빛을 받아 희뿌옇게 서 있던 그 존재와 눈이 마주친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조롱의 빛을 띤 유독 크고 검은 눈동자, 새까맣게 뒤로 넘긴 머리, 그리고 동그랗고 하얀 얼굴빛 때문에 그저 온통 하얀 옷을 입은 듯한 그녀, 아니 그것.

다시 눈을 질끈 감는 순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저 아래층 구석방에 웅크린 채 고양이 소리를 내며 하루종일 울고 있는 내 할머니의 이름 모를 병이 지금 내게 보이는 저 존재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그 순간 바깥 정원에서는 충견 맥스가 셰퍼트 특유의 우렁찬 소리로 맹렬히 짖고 있었다. 그리고 알람이 요란하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곧 인근 경비대가 출동해 주위를 수색하고는 말할 것이다. 아마도 도둑 고양이가 담장을 넘어 센서가 울린 것 같다고. 그 높은 담장 위 철조망 가시 사이를 매일 밤 넘어다녔다면, 아무리 고양이라도 무사할 리 만무한데 말이다.

흠칫 놀라 눈을 뜨니 10분 단위로 설정해 놓은 알람이 초조하게 울려대고 있었다. 또 같은 꿈을 꾸었다. 그 시절의 아픈 기억들은 이미 흐릿해졌지만 그 시간속 어린 내가 지녔던 모든 것들에 대한 기억은 더 큰 그리움으로 자리잡아 이내 상실감으로 돌아와 가슴을 헤집어놓고야 만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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